1988년
고등학교 때 였다. 5공화국 청문회가 열리던 시절이었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이 되면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모두 학교 매점에 모여 텔레비전으로
청문회를 보곤 했다.
1987년 6월 항쟁이 있은 그 다음해라 한국 사람들 중 정치적으로 민감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그때 노무현을 처음 봤다.
"아 그 사람 말 한 번 시원하게 하네!"
매점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선생님이 말했다.
"그래도 저거 너무 심한거 아냐?"
노무현이라는 아이콘이 생성되는 시점이었다.
1995년
노무현이 부산시장으로 출마했다가 떨어졌다.
저 사람 몇 년 전에 부산에서 국회의원 나왔다가 떨어졌는데 또 나왔다는 생각을 했다.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2000년
김대중이 대통령이었던 시절 노무현이 해양 수산부 장관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동교동계의 간택을 받았다느니 그렇지 않았다느니 말이 많았다.
노무현이 해양 수산부 장관감인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었다.
2002년
노무현 돌풍이 일었다. 지금까지 없었던 열풍이었기에 신기했다.
그 무렵 나는 노사모라는 곳이 궁금했고, 한 편으로는 노무현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궁금했다.
노사모에 가입을 했고 노무현이란 사람이 지금껏 어떤 행보를 했는지 제대로 알 수 있었다.
2003년
노무현이 그동안 주구장창 외치던 통합,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당,
열린 우리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기존 대통령과는 달리 당정을 완전 분리하여 독립성을 보존해 줬다.
성숙하지 못했던 열우당 정치인들은 서로 서열, 줄대기 등으로 논란이 많이 일었다.
2004년
노무현 탄핵 소추안이 의회에 상정되었다.
자기들 마음에 안든다고 대통령을 자리에서 끌어 내리려 했다.
몇 개월 뒤 노무현은 다시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큰 상처를 입었음을 알 수 있었고 나 또한 상처 받은 대통령에 대한 미안함을 느꼈다.
2006년
밤 늦게 귀가 길에 택시를 탔다. 택시 아저씨가 대뜸 노무현 욕을 하기 시작했다.
노무현 때문에 경제가 이 지경이 되었다며 갖은 욕을 다 했다.
주변에 노무현을 욕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 졌다.
레임덕이려니 생각하기엔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2007년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했던 정동영이가 열린우리당 창당을 반성한다고 했다.
그도 늘 그렇고 그런 정치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2008년
노무현 측근에 대한 비리 사건이 터지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터질 것이라 확신했지만 막상 터지고 보니 그 금전적 규모가 소박한 수준이었다.
전두환, 노태우 비리를 보고 나니 노무현 측근의 비리는 생계형 비리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10년 동안 정권을 빼앗겼다고 생각한 사람들이니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2009년
몇 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노무현 측근과 그 가족들의 비리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10억 대신 100만불 이라는 표현을 계속 쓰는 이유가 궁금했다.
검찰이 조사때마다 언론에 정보를 흘리는 친절의 이유가 궁금했다.
아는 사람과 술자리에서 농담 삼아 "계속 이러면 노무현 성격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정말 그렇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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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주 토요일 서거 소식을 들었다.
눈물이 났다.
그 날, 살아 생전 못가 본 그 곳을 죽고 나서야 갔다.
내일이면 못볼 분, 어제 저녁 부산역 추모제에 갔다.
새벽에 일어나 봉하마을의 모습을 지켜봤다.
종이 비행기가 눈물을 머금도 날아 올랐다.
오늘 아침에는 노란 넥타이를 매고 출근을 했다.
살다보면 기억해야 할 것이 정말 많다.
어떤 사람은 변절의 인생을 살고 간혹 어떤 사람은 올곧음의 인생을 산다.
그저 마음에 묻을 생각이다.
살아 있는 노무현만 기억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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