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hing else2009. 3. 14.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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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방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20대의 청년과 가장 느린 50대의 노년이 경주를 하였습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우화를 실험해 본 놀이가 아니라 청년은 한 발로 뛰고 노년은 두 발로 뛰는, 일견 공평한 경주였읍니다. 결과는 예상을 뒤엎고 50대 노년이 거뜬히 이겼습니다. 한 발과 두 발의 엄청난 차이를 실감케 해준 한판 승부였습니다...

그런데 징역살이에서 느끼는 불행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한 발 걸음이라는 외로운 보행입니다. 실천과 인식이라는 두 개의 다리 중에서 '실천의 다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실천 활동을 통하여 외계의 사물과 접촉함으로써 인식을 가지게 되며, 이를 다시 실천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그 진리성이 검증되는 것입니다. 실천은 인식의 원천인 동시에 그 진리성의 규준이라 합니다...

징역 속에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이 맨 처음 시작하는 일이 책을 읽는 일입니다...

그러나 독서는 실천이 아니며 독서는 다리가 되어 주지 않았읍니다. 그것은 역시 한 발 걸음이었읍니다. 더구나 독서가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 까닭은 그것이 한 발 걸음이라 더디다는 데에 있다기보다는 '인식->인식->인식......'의 과정을 되풀이하는 동안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현실의 튼튼한 땅을 잃고 공중으로 공중으로 지극히 관념화해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모든 불구자가 그러듯이 목발을 짚고 걸어가기로 작정하였읍니다. 제가 처음 목발로 삼은 것은 다른 사람들의 경험, 즉 '과거의 실천'이었읍니다. 목발은 비록 단단하기는 해도 자기의 피가 통하는 생다리와 같을 수 없기 때문에 두 개의 다리가 줄곧 서로 차질을 빚어 걸음이 더디고, 뒤뚱거리고, 넘어지기 일쑤였읍니다. 그러나 이 어색한 걸음새도 세월이 흐르고 손때가 묻으면서 그럭저럭 이력이 나고 보속과 맵시가 붙어 갔읍니다.

그런데 이 경우의 소위 이력이라는 것이 제게는 매우 귀중한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나의 인식이 내가 목발로 삼은 그 경험들의 임자들의 인식을 배우고 그것을 닮아감으로써 비로소 걸음걸이를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징역 동료들의 경험들이 단지 과거의 것으로 화석화되어 있지 않고 현재의 징역 그 자체와 튼튼히 연계되거나 그 일부를 구성하고 있으므로 해서 강렬한 현재성을 띠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의 걸음걸이로 저마다의 인생을 걸어가는 것이겠지만, 땅을 박차서 땅을 얻든, 그 위에 쓰러져 그것을 얻든, 죽어서 땅 속에 묻히기까지는 거대한 실천의 대륙 위를 걸어가기 마련이라 생각됩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신영복 (1984)



현명한 자는 책과 글이 하는 이야기를 이해하고 그것에 자신의 마음을 담글 줄 안다.
어리석은 자는 문구 하나와 문장 하나의 사전적 의미에 모든 것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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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es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