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잡스'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0.05.04 애플 디자인의 심장, Jonathan Ive
  2. 2004.10.21 태양왕, 스티브잡스
디자인2010. 5. 4. 09:33

독창적인 신기술과 디자인 그리고 마케팅 기법으로 세상을 바꾸는 애플입니다.
물론 스티브 잡스가 정점에 있습니다.
잡스와 애플의 성공에는 날고 기는 수많은 천재적 엔지니어가 있기도 하지만 초연하게 있는듯 없는듯 쿠퍼티노 비밀 던젼의 심장부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디자인팀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엔지니어, 마케팅 담당들을 제치고 디자인팀이 애플의 핵이라는 주장에 대한 이유를 지금부터 펼쳐보겠습니다.

수 만명의 직원을 가진 애플이지만 디자인팀은 단 12명 남짓의 멤버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죠니"라는 애칭의 영국인 조나단 아이브(Jonatah Ive)가 팀장 입니다. 이 사람이 영국에 한번 뜨면 팬클럽 젊은이들이 공항까지 마중나올 정도로 대단한 산업 디자인게의 거물입니다. 패션 디자이너도 록스타도 아닌데 팬들이 만들어놓은 매니아 사이트가 있을 정도입니다. 대중적 인기와 관심을 집중받지만 실제는 아주 얌전한 사람입니다.
공공장소에 등장하는일도 별로없고, 잡스가 화려한 프레센테이션 기법으로 애플의 신제품을 소개하며 대중을 사로잡지만 아이브는 그 뒤에서 말없이 잡스를 튼실하게 지켜주는 사람입니다.
스컬리가 뽑은 사람이지만 잡스에 의해 다듬어진 보석 조나단 아이브입니다. 두 사람의 묘한 관계도 재밌습니다




Industrial Design

산업 디자인을 잠깐 이야기해보죠. "Not too much, not too less"란 말이 있습니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게하라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물건을 디자인하는데 그것이 마치 피카소 같은 추상적 기법이나 앤디 워홀의 현란한 컬러가 들어가면 좀 과합니다. 그렇다고 그냥 되는대로 만들수도없는 것이고, 디자인은 일단 필수입니다.
그러다보니 바우하우스로 시작된 독일의 미니멀리스틱 디자인이 많은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70년대 까지만해도 산업디자인 분야는 제조업에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귀엽고 애쁜 디자인"이 일본의 디자인이었다면 미국의 디자인은 "투박한" 실용적 디자인이었습니다. 이때 그나마 사람들의 눈길을 끈게 독일의 가전사 Braun이었습니다.
자동 면도기에서부터 주방기기 등…미니멀리스틱 디자인을 꽃피운 회사입니다.

오래전에 독일 여행을 갔었습니다. 돈을 절약하느라 프랑크푸프트의 허름한 호텔을 찾아습니다. 6층 고딕양식의 남루한 건물이었는데 화장실만한 방에 옷장보다 작은 샤워실, 하지만 정말 놀랐습니다. 겉에서 본 오래된 구닥다리 빌딩의 흔적은 사라지고 마치 비행접시 침실에 들어간 초현대식 방이었습니다. 문고리에서부터 전기불 스위치 등 탁월한 공간배치와 순한 연녹색으로 시작되는 가구와 벽색 등 정말 대단한 경험이었습니다. 모든 디자인에서 미니멀리스틱한 심미주의가 배어나오는것 이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자동차에서부터 문방도구까지의 독일 제품 디자인이 남다르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반면 미국에는 디자인적으로 이렇다할 전통이 없었습니다. 실용주의 흐름이 너무 강해 지금까지도 그런 트렌드는 이어지고 있으며 쉽게 사용하고 빨리 버리고 편하기만하면 되는...
애플이 미국에 있지만 애플은 다릅니다. 애플하면 이론의 여지없이 세계적으로 가장 앞서가는 디자인감각을 가진 회사라 생각 합니다.

스티브 잡스의 완벽주의를 구현해주는 디자인 팀장 "죠니"가 애플의 뉴욕 매해턴 리테일 매장에 장식용으로 갖다놓은 이태리 대리석을 봤습니다. 그는 관계자를 설득해 뉴욕 매장의 대리석을 본사로 보내라고 합니다. 대리석의 결을 만져보고 그 결의 패턴을 그려보고 이 대리석을 갖고 무슨 디자인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왜 그렇게 고민을 해야했을까요?

한 일화가 있습니다. 잡스의 성질 유명하지요. 한번은 잡스가 디자인팀을 모두 모아놓고 일갈했습니다.
새로운 맥을 디자인하는데 "절대로 절대로 나사 하나 있어선 안된다"고 했습니다. 프로토타입이 만들어졌는데 이 프로토타입에 아래쪽에 나사 하나가 발견됐습니다. 그 부분을 디자인했던 사람은 안타깝게도 잡스에게 그 자리에서 해고 당했습니다. 그는 현재 Nike사의 디자인부 Advanced Innovation Division의 책임자인 레이 라일리인데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완벽을 추구하는 디자인 감각의 유일무이한 회사가 애플이다."
 

Odd Couple or Twin?

아이브는 잡스와 매일 독대하는 사이입니다. 사실 잡스가 애플에서 하는 일 중 70%가 디자인팀과의 회의입니다.
두 사람은 몸은 다르지만 한 배에서 태어난 쌍둥이 같습니다. 둘 다 자신의 사생활을 드러내지 않고 은둔생활을 하고 둘다 완벽주의자입니다. 아울러 부자이지만 가장 겸손하게 일반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둘 다 양복보단 티셔츠에 청바지를 좋아합니다. 차이점은 잡스는 키노트를 좋아하지만 아이브는 맥을 만들 재질을 만져보는것을 더 좋아합니다. 더 중요하게는 둘 다 시대정신을 이끌어주는 제품과 제품 디자인의 창조에 자신의 삶을 헌신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이브는 절대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지 않습니다. 항상 같은 이야기지만 그는 "애플 디자인팀의 성공"이라고 되풀이합니다. 재미나게도 전세계 컴퓨터 업계를 리드하는 애플의 디자인팀은 단 12명 입니다. 이에 대해 "창조적 디자인 일을 하는데 사공이 많을 필요는 없다. 주어진 목적을 가장 아름답게 가장 독특하게 가장 경제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전체 팀원이 아이디어를 내고 그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면서 애플의 디자인은 완성된다."고 아이브는 이야기 합니다. 

12명 팀원의 평균 연봉은 2007년 무렵 20만달러 였습니다. 업계 연봉과 비교 했을 때 애플 디자이너들의 2배 정도의 월급을 더 받는 셈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노력하는 업무량은 세 배, 네 배 그 이상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들은 같은 장소에서 함께 일 합니다. 물론 독자적인 방도 있지만 협력하는 일이 대부분이라 랩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애플 일반 직원들은 디자인팀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릅니다. 하나의 신제품을 만들기 위해 재질을 확보하고 이 재질을 손으로 만지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결과물을 상상합니다. 어떤 모습일까...
그 결과물을 향해 팀웍으로 똘똘 뭉쳐 달려가고 있습니다.

아이브는 "애플에서 디자인팀은 돈을 벌기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며 "하나의 완성된 작품을 만드는게 첫 번째 목적"이라고 합니다. 일반기업에서 디자인 팀장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하면 쫓겨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애플에는 잡스가 있고 이런 환상의 디자인 팀이 스스로 결집하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애플 디자인 팀은 결과물의 완결성에 100% 자신감을 갖습니다. 그만큼 완벽을 위한 노력을 했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12명의 팀원이 수 개월을 단 한가지 디자인에 집중합니다.
최초 아이팟 모델의 흰색을 보다 질감 높은 색을 띠게 하기 위해 하얀색 플라스틱위에 어떤 재질의 코팅을 입힐것인가를 연구했다고 합니다. 또 아이맥 27인모델의 "스와이블 힌지" 모니터 지지대. 이거 하나 디자인하는데 6개월이 걸렸다고 합니다.

애플 제품이 몇개 되지도 않지만 제품 하나 하나에 이런 시간과 투자가 투입되는데 이보다 외형적으로 더 큰 HP, Dell, MS가 자사 제품의 디자인에 투입하는 노력은 어느정도일까요?

아이브가 더욱 높게 평가받는게 스스로의 재능도 있지만 12명의 팀원을 통솔하는 리더쉽입니다. 자칫 모나기 쉬운 예술가 집단을 모아놓고 한 사람 한 사람의 ego를 제쳐놓고 팀플레이를 하게 만드는 그의 실천력이 독보적인 것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천재적으로 똑똑한 사람은 많지만 여러 사람과 화합하면서 팀 능력을 배가시키는 사람은 드뭅니다.


Diamond in the Rough

올해 42살의 아이브 역시 잡스처럼 특출난 학력을 갖고 있진 않습니다. 런던 태생인 그는 명문과는 거리가먼 뉴캐슬 폴리테크닉에서 디자인을 전공했습니다. 하지만 디자인에 대한 그의 정열이 누구보다 뛰어난 감각을 갖춘 노력형 인물입니다.
4학년 졸업반 시절 아이브는 디자인 컨설팅회사에서 인턴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아이브는 펜을 하나 디자인했습니다.
똑같은 펜인데 꼭대기에 쇠구슬을 하나 넣어 똑깍똑깍 손장난을 가능하게 만든 디자인이었습니다.
아이브를 지켜봤던 풀타임 디자이너 그라이너는 "꿈을 실현시켜주는 디자인"이었다며 "기능과 상관없이 제품에 엑스트라 감정을 품게해주는 디자인이었고 누구나 갖고 놀고싶어하는 그런 펜 디자인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학교를 졸업하면서 아이브는 영국 디자인 전공자들에게 최고의 영예인 "로열 소사이어티 오브 아트" 최고상을 받았습니다.

그이후 그는 미국 회사로부터 스카웃제의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제품 디자인보다 저렴한 가격이 우선하는 회사 방침에 몹시 실망한 아이브는 캘리포니아 이주를 고려했습니다. 그가 찾아간 곳은 실리콘밸리의 루나 디자인.
이곳에서 그는 물음표 모양의 이쁜 전화기를 디자인해 명성을 쌓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아이브의 천재성과 그를 밀어줄만한 회사는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던중 92년 잡스없는 애플에 발을 들여놓게 되고 그곳에서 팀장으로 발탁되면서 PowerBook 랩톱 디자인을 기획합니다. 하지만 시기적으로 애플은 서서히 적자만 늘어가는 회사였기 때문에 디자인 부서에 많은 지원이 따라주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컴퓨터 디자인에 남다른 성취욕구가 솟아오른 아이브는 주어진 조건속에서 사람들을 놀라게하는 제품 디자인을 하나씩 선보였습니다.

그중 하나가 애플의 최초 PDA 뉴튼 이었습니다. 당시 아이브와 함께 일했던 디자이너는 이렇게 말합니다. "열악한 조건속에서 모두가 불평하고 있었지만 아이브는 조용히 자신의 책상을 지키며 동료들의 도움을 이끌어냈고 또 동료들은 아이브를 신뢰했기 때문에 그를 도왔습니다."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디자인 부서에서 렌더링을 위해 사용하던 슈퍼컴퓨터까지 내다 팔 정도로 열악한 조건이었고 모두가 생존을 위해 버티고 있었을때 잡스가 돌아왔습니다. 애플에는 칼바람이 불었고, 60가지 애플 제품 중 6가지만 남기고 모두 게거했습니다.
또 전임자들이 뽑았던 전문가들을 해고시킨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때 아이브도 한동안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를 정도로 압박을 받았을 때였습니다. 잡스는 가장 중요한 디자인 책임자를 위해 IBM 싱크패드 다지이너 리처드 새퍼, 이태리의 자동차 디자이너 지오르게토 지기아로 등을 스카웃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수 천명의 직원이 해고되고 부서가 사라지는 상황에 아이브는 잡스의 신뢰를 얻게되었고, 잡스는 어느 날 회의에서 "애플이 나갈 방향"을 설명하며 "그 방향을 조나단 아이브가 잡을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Insanely Great Product

이 후 두 사람은 애플의 쌍두마차가 되었습니다. 잡스가 앞장서고 아이브가 밀어주고~
두 사람의 협업은 애플의 신상품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배경철학은 1997년 당시 컴터는 여전히 일반인들에게 소원한 앞선 기술적 제품이었고, 두 사람은 누구나 친근감을 느끼고 쉽게 만질 수 있는 컴터 설계에 들어갔습니다.
All-In-One iMac !!

아이브는 기술진의 개발과정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구상하는 디자인을 구체화시켜 나갔습니다. 플라스틱 재질을 사용하는데 어떻게 싸구려틱하지 않게 하면서 멋진 빛깔을 만들 수 있을까가 고민이었습니다. 아이브는 이 때문에 팀원들과 함께 사탕공장을 방문해 사탕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어떻게 투명하고 이쁜 색이 만들어지지를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또 방법을 찾아낸 이후 어떻게 플라스틱 케이스가 나오는지를 구현하기 위해 케이스 담당 아시아 공장을 찾아 자신이 원하는 색과 질감이 나타나도록 수 개월을 또 그곳에서 지새웠습니다. 이처럼 애플의 디자이너는 제품을 심미적으로 디자인하는것 뿐만아니라 제조공정까지 참여하고 파이널 프로덕트를 확인합니다.
결과는 업계 케이스 평균원가 20달러였던 시절, 최초 아이맥 케이스 원가가 65달러 였습니다.

2001년 애플은 타이타늄소재의 파워북을 출시합니다.
이 때 아이브는 팀원중 2명을 선발해 특명을 내립니다. 샌프란시스코의 허름한 창고를 하나 빌려 그곳에 수 만 달러 슈퍼컴퓨터를 설치해서 6주 동안 비밀리에 디자인 렌더링을 시켰습니다. 그 후 아이브는 아시아의 파트너 회사를 방문해 와이드스크린 엘씨디 패널 디자인을 조사해 어떻게 하면 이 패널을 타이타늄에 장착시킬것인가를 고안했습니다.
결과는 깨끗하고 간결한 포스트 모더니스틱 쿨 파워북이었습니다!!
뿐만아니라 하얀색 아이맥 와이드 스크린 디자인까지 이때 완성이 되었습니다.
아이브가 디자인을 책임지고 잡스가 업계 스탠더를 한 단계, 두 단계 높이는 작업이 착착 진행된 것입니다.

아이브의 디자인은 여러가지로 집약됩니다. 포스트 모더니스틱, 미니멀리스틱, 리트로스펙티브(클래식컬하다는 표현), 유일무이한 질감(Texture) 여기에 마지막으로 Fit & Finish(일체감)로 압축됩니다. 뿐만아니라 엔지니어링의 획기적인 제조기법이 등장합니다. 디자인에 맞춘 하드웨어이다보니 당연한 결과 였습니다. 그 어떤 매스 프로덕션 제조사에서도 이런 일을 감행하지 못했습니다. 우선 비용 때문에 생각할 수 없는 일이며, 또 근시안적인 마케팅 결과를 바라보니 도전조차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업계 사고방식을 뛰어넘는게 애플이고 남들이 생각조차 못하는 방법으로 성공할 수 있따는 모범사례를 잡스와 아이브스가 입증하고 있습니다.

재미난 사실은 애플에 납품하는 아시아의 공장들이 애플과 일하는 방식을 선호한다고 합니다. 결과에 대한 엄격한 스펙, 치밀한 제조 공정, 불량률의 최소화 등 결국 애플이 업계를 발전시켜나가는데 최전선에 서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과정속에서 실패도 있었습니다.
G4 Cube는 투명 케이스에서 발생하는 균열을 미쳐 못알아냈고 아이팟 나노의 스크래치 문제 배터리 문제 등..
하지만 장기적으로 애플의 혁명적이고 획기적인 insanely great product를 만들어냈다는데 이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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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geston
경영/경제2004. 10. 21. 12:57
Apple, Macintosh의 신화, 스티브잡스를 아시나요?

이 사나이는 사실 누구라도 정나미가 떨어지게 할 수 있는 성깔 있는 사나이다. 그는 오만하고 이기적이며, 극단을 달리는 데다가, 으스댐도 장난 아니다. 게다가 광적이고, 권력에도 굶주려 있으며, 참을성도 없다.
과대망상증도 있음은 물론이다.

이런 사내가 바로 스티븐 폴 잡스다. 애플 CEO, 스티브는 언제나 옳다.
스티브이니까. 그리고 "우리가 음악 사업에 혁명을 일으켰습니다."라는 말을 증명하는 데에도 잡스는 직설적이었다.

잡스는 누구보다도 그 점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그의 아이디어를 자찬하였다.
마치 록스타처럼,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심포니홀을, 런던에서는 Billingsgate-Fischmarkt를 빌렸었다.
내일은 다시 우드스톡이다. 10시가 되면 그는 다시금 샌프란시스코의 개발자 앞에 나서서, 청바지와 검은 스웨터 차림으로 제품을 슬그머니 발표할 것이다. 이어지는 박수는 말할 것도 없고...

"타임-매거진"은 잡스의 이런 모습을 콜로세움 안의 로마 제국 황제에 비유한 적이 있다.


"머큐리 뉴스"는 다만, "State of the Mac Adresses"이라고만 표현했다.
애플-시민들에게는 정말 최고의 순간이다.

스티브 쇼에서 정말 드라마틱한 순간은 이런 기조 연설 훨썬 이전부터 일어난다.
애플만큼 루머 사이트들을 잘 요리하는, 잘 이해하는 회사가 과연 있을까?
애플 사용자들 자신도 "AppleInsider"나, "MacRumors", "MacNN", "Thinksecret", "MacMinute" 등의 사이트에서 새소식 없나 두리번 거린다.

그런 까닭은 무엇보다도 스티브 잡스가 전혀 사교적이지 않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언론은 언론대로 그때문에 고생한다. 인터뷰는 10분 이상 허용이 안 되고, 일 년은 미리 예약을 받아 두어야 한다.
거대 언론사들도 마찬가지로 고생이다.
그와 인터뷰를 성사시킨 것 자체가 행운이다. 주간지인 "Die Zeit"의 한 저널리스트는 실제로 인터뷰에 들어가기 3 분 전에서야 허락을 받았고, 그렇게 해서도 "엉뚱한 질문"과 "메스껍도록 회의적인 태도"에 사과를 해야 했다. ZDF는 고가의 조명 시설과 카메라를 써 보지도 못한 채 치워야 했다. 잡스께서 인터뷰 할 마음이 싹 가셨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은 생방송에서도 일어났다.
"짐이 곧 국가다."는 루이 14세만이 아니다. 잡스도 그러하다.

여하간 잡스는 극단적으로 성질을 잘 낸다. 모나 심슨과 남매라도 되잖을까.
소설, "A Regular Guy"의 저자는 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의 오빠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그는 화장실 청소마저도 너무나 열성적이었다." 덕택에 남매는 관계가 차가워진다.

스티브 잡스는 언제나 뚜렷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이제 49살이 된 그는 캘리포니아 산타클라라의 양부모 밑에서 자라났다. 오레곤 주 Reed 대학에서 물리학과 문학을 공부한 잡스는 길들여지기를 거부하였다. 그는 대학 안에서 맨발로 걸어다니면서, 머리는 장발로 하고, 약물도 경험한다.

고등 학교에 다닐 당시 그는 이미 "Wire-Heads"라는 비공인-맹렬 컴퓨터 그룹에 들어가 있었다.
졸업 후 그는 개인적으로 윌리암 휼렛(William R. Hewlett)에게 휴일 일자리를 지원하였다.
그 후에는 아타리에서 비디오게임 디자이너 일을 하기도 하였다.

불교도 여기에 추가된다. 1974년 잡스는 인도에 몇 달 동안 체류한다.
인도에서 한 구루가 그를 채식주의자로 탈바꿈시키게 된다.
돌아온 이후, 그는 스티브 워즈니악(다섯 살이 더 많다)과 교제하고 학업도 중단한다.

둘은 1976년 애플 컴퓨터를 창립한다.
이름부터가 이미 즉흥적이었다. 잡스는 아타리의 전임-고용주에게 전화번호부를 집어 던졌기 때문에, 부모 집 차고에서 회사를 차릴 수 밖에 없었다.
봅딜런 노래를 기타로 연주하던 당시 잡스는 애플 I 프로토타입을 임신중인 누이 Patty에게 집안 마루에서 처음으로 팔았다.
동네 회사에서는 25 대를 주문하였고, 잡스는 제품 판매를 위해 폴크스바겐 버스를 팔아치워야 했다.

하지만 진짜 히트 상품은 이듬 해에 나온 애플 II였다. 키보드와 합체였던 이 컴퓨터는 대량 판매를 이룩했다. 스티브 잡스의 행보도 빨라졌다. "23 살에는 백만 장자가 되고, 24 살에는 천만 장자가, 25 살에는 억만 장자가 됐습니다. 하지만 돈 벌려고 그런 것은 아니니까 그런 게 중요하진 않죠."
25살에 그는 처음으로 포브스 지가 선정한 미국 부자 목록에 들어간다. 그것도 최연소 백만 장자로서 말이다.

1980년, 애플은 주식 시장에 상장된다. 그런데 애플 III는 전임작의 성공을 이어갈 수 없었다.
당시 이미 잡스는 내부에서 따로 팀을 꾸려서 매킨토시를 개발중이었다.
잡스는 애플 CEO로서 당시 펩시콜라 사장이었던 존 스컬리를 영입한다.

그러자 애플 내의 권력 투쟁도 강도를 더해갔다. 스컬리가 그 장본인이였고, 잡스는 사업에 대해 예민해저만 갔다. 심지어 잡스 사무실이 바깥의 외진 곳으로 옮겨지기도 했었다. 그는 이 곳을 "시베리아"라 불렀다.

1985년 잡스는 애플에서 나와 NeXT를 따로 창립한다.
하지만 넥스트는 성공을 이루지 못하다가, 10여 년 후에 다시 애플로 병합된다.

행운아 잡스는 영화 업계에도 발을 들여 놓는다. 1986년, 그는 스타워즈의 제작자, 조지 루카스로부터 천만 달러에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인수한다. 사장이자 CEO로서 잡스는 디즈니와 컴퓨터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 "토이스토리 2", "벅스라이프", "몬스터 주식회사", "니모를 찾아서"의 생산에 대한 계약을 맺는다. 이들 영화로 픽사는 20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인다.

픽사는 잡스를 재벌로 만들어 주었고, 세상도 그의 재능을 다시금 기억해 주었다. 바로 창조성을 지닌 기술 개발자로서 말이다. 하지만 픽사의 CEO는 디즈니에 대해 거의 존경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디즈니 CEO, 마이클 아이즈너도 잡스만큼이나 디즈니에 피곤해 한 점은 마찬가지였다.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런데 2006년부터는 픽사가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야 한다. 

애플은 1997년, 자신의 창립자를 다시 맞이한다. 타이밍도 알맞았다.
당시 애플은 깊은 위기에 휩싸여 있었으며 일곱 분기 연속 적자 상태였다.
시장 점유율은 거의 3%로 떨어졌었다. 잡스는 임시(inerim)이라는 의미로
자신을 "iCEO"라 불렀다.

2000년이 되어서야 그는 정식 CEO에 오른다. 연봉을 일 달러만 받던 그를 위해 이사회에서는 그에게 Gulfstream-Jet기를 선물로 주기도 하였다. 지난 해에는 스톡 옵션까지 더해져서 그의 소득은 7500만 달러가 되었다.

잡스는 회사를 구해냈다. 우선 그는 마이크로소프트와 협상을 해서, 빌 게이츠가 애플에 1억 5천만 달러를 투자하도록 이끌었다. 여기에 대해 실망한 애플 팬들이 많았다. 이들에게 있어 게이츠의 투자는 적과의 동침이었다. 그리고 잡스는 레몬색과 딸기색 등의 다양한 색상을 갖춘 아이맥을 선보였다. 당시 잡스의 말이다. "컴퓨터 구입에 있어 제일 중요한 질문은 바로 미래입니다. 어떤 색상이 요새 잘팔립니까?" 

90년대 말이 되자 애플은 다시 흑자로 돌아서게 된다.
애플의 아이북과 파워맥 G3도 제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큐브와 반구형 아이맥의 실패도 빠르게 극복하였다. 
2000년 1월에 이미 잡스는 이렇게 말했다.
"향후 10년 안에, 애플은 제일 성공적인 십대 기업 이라는 말을 들을 것입니다."
애플 직워들은 그러한 비전에 열광한다. 그들의 보스는 두려움의 대상인 동시에 경외의 대상이다. 잡스의 카리스마와 한 성질은 모두를 확신시킨다. 전기 작가인 알란 도이치만(Alan Deutschman)은 이렇게 표현했다. "한 번 잡스를 만나서, 잡스의 말을 들어 보면, 가끔 잡스 안에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잡스의 목표는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
LSD 복용에 대한 질문에서는 면접 수험생처럼 자제심을 잃던 그는 지난 3년간 아이포드 뮤직 플레이를 크게 히트시켰다.
비판가들은 399 달러의 가격이 무슨 히트작이 되겠냐 비웃었지만, 그동안 애플은 3백만 대 이상의 아이포드를 판매하였고, 올해 첫 세달만 해도 80만 대를 팔았다. 지난 해 동기에 비해서 이윤도 세 배로 뛰어 올랐다.
그런데 이번에 애플은 중대한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스티브 잡스가 처음으로 컴퓨터보다 아이포드를 더 많이 판매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애플은 자신을 그동안 불법 인터넷 다운로드로 허덕이던 음악 사업의 구세주로 자찬하였다.
미국의 아이튠즈 뮤직 스토어만 해도, 곡당 99 센트의 가격으로 한 주일에 300만 달러를 벌어들인다. 6월 중순에 시작한 아이튠즈 유럽도 시작한 지 일 주일만에 80만 곡의 판매를 이룩하였다.

비디오-아이포드가 언제쯤 나올 지를 질문한 저널리스트가 한 명 있었다. 스티브 잡스의 답변은 날카로웠다. "아이포드가 토스트를 구울 수 있을 때겠죠. Es geht um Musik, Trottel." 


Artikel erschienen am 27. Juni 2004
    
WAMS.de 1995 -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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